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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스토리박현주 시리즈
박현주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

월급 12만 원 증권맨이 1997년 IMF 위기 한가운데서 미래에셋을 창업해 한국 자산운용 산업을 만들어낸 이야기. 자본금 100억으로 채권·주식·뮤추얼 펀드 3단계 베팅을 통해 1998년 한국 최초의 "박현주 1호" 펀드를 출시했다.

2026년 5월 10일·13분 읽기·인터랙티브 2개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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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PODCAST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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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liview Guru Story — 박현주 EP.1

1990년, 32세의 증권사 지점장이 지점 벽에 한 줄을 걸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 문장이 그의 지점 훈이 됐고, 이후 30년간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원칙이 됐다. 이것은 박현주가 농부의 아들에서 한국 자본시장의 개척자가 된 이야기의 시작이다.

1. 광주의 소년

박현주. 1958년 10월 17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부였다. 유복하지 않은 가정이었다.

그의 인생을 바꾼 첫 번째 사건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박현주가 광주제일고등학교에 합격 통지를 받던 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전남 최고 명문 고교 합격이라는 기쁨과 아버지의 죽음이 같은 날에 겹친 것이다.

린치가 10세에 아버지를 잃고 골프장 캐디가 됐듯이, 박현주도 아버지를 일찍 잃으면서 경제적 자립에 대한 강박이 생겼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응 방식은 달랐다. 린치는 캐디를 하면서 금융인들의 대화를 들었다. 박현주는 어머니의 가르침에서 방향을 잡았다.

어머니는 두 가지를 가르쳤다. 신뢰, 성실, 정직. 그리고 돈을 계획적으로 쓰는 법.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할 때 1년에 한 번씩만 용돈을 줬다. 한 번에 받은 돈을 12개월 동안 나눠 써야 했다. 이 습관이 그의 자금 관리 감각의 뿌리가 됐다.

"어머니는 돈을 꿔달라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자기 것을 나눠줄 정도로 인정이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1년에 한 번만 용돈을 주셨습니다. 그 안에서 1년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때 배운 것이 돈을 관리하는 법입니다."
"늘 돈은 꽃과 같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바르게 벌어서 바르게 쓸 때, 돈은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이런 철학을 심어주신 분은 가장 큰 스승이었던 어머님입니다."

2. 명동의 대학생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대학 시절, 한 문장이 그의 인생을 결정했다.

"자본시장의 발전 없이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어디서 읽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이 그를 증권업으로 이끌었다.

대학 2학년부터 어머니가 보내준 생활비로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 당시 명동이 한국 증권가의 중심이었다. 그는 명동 증권가를 돌아다니며 시세판을 보고, 주식을 사고, 시장을 배웠다.

린치가 골프장에서 금융인의 대화를 들으며 시장을 배웠듯이, 리버모어가 증권사 칠판 앞에서 숫자의 패턴을 배웠듯이, 박현주는 명동의 시세판 앞에서 한국 자본시장을 배웠다.

이 시기에 그는 한 사람을 찾아갔다. 백희엽. 한국 증권 역사의 전설적 인물. '백 할머니'로 불린 개인투자자였다. 박현주는 젊은 대학생 시절 백희엽을 직접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기업 탐방에 동행하기도 했다. 버핏이 그레이엄을 찾아간 것처럼, 박현주는 백희엽을 찾아간 것이다.

3. 여의도의 증권맨

고려대학교 졸업 후, 박현주는 자본시장에 뛰어들었다. 27세. 처음에는 투자자문회사를 차려 대표로 활동했다. 그러나 시장을 더 깊이 배우기 위해 증권사에 입사하기로 결심했다.

여러 증권사의 영입 제안이 있었지만, 그는 시장 분석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을 택했다. 동양증권(현 유안타증권) 영업부.

입사 첫 달 월급: 12만 원. 이미 투자자문회사 대표를 하다가 월급 12만 원짜리 영업 사원으로 들어간 것이다. 주변에서는 미쳤다고 했다. 그의 논리는 달랐다.

"돈을 벌려고 증권사에 들어간 게 아닙니다. 시장을 배우려고 들어간 겁니다. 시장을 제대로 배우면 돈은 따라옵니다."

입사 3개월 만에 3억 원 규모의 법인 주문을 따냈다. 대리로 진급. 이후 한신증권으로 옮겼다. 승진 속도는 비정상적이었다. 32세에 지점장. 국내 증권업계 최연소 기록. 이듬해 지점 영업실적 1위. 그리고 최연소 임원 승진.

여의도 증권가에서 박현주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다. 이 시기에 그의 명함 뒤에는 항상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4. 연봉 10억의 거절

1990년대 중반, 박현주에게 제안이 왔다. 외국계 증권사에서 연봉 10억 원의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서울 강남 아파트 평당 가격이 350만 원이던 시절이었다. 연봉 10억이면 강남 아파트를 매년 한 채씩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박현주는 거절했다.

"돈에 제 꿈을 팔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의 꿈은 무엇이었는가. 자기 회사를 만드는 것. 자산운용사를 만드는 것. 한국의 자본시장을 바꾸는 것. 대학 시절 들었던 그 문장. "자본시장의 발전 없이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 그 문장을 직접 실현하고 싶었다.

1997년, 39세가 되던 해. 박현주는 사표를 냈다. 직장 생활 10여 년간 모은 돈을 보탰다. 지인들의 투자를 받아 자본금 100억 원을 모았다.

미래에셋 벤처캐피탈(현 미래에셋캐피탈)과 미래에셋투자자문(현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설립했다. 1997년 6월. 창업.

그리고 6개월 뒤, 한국 경제가 무너졌다.

5. IMF — 6개월 만의 위기

1997년 11월. IMF 외환위기.

한국 원화가 폭락했다.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800원대에서 2,000원 가까이 치솟았다. 기업들이 연쇄 부도. 대우, 한보, 삼미, 진로. 대기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실업률이 치솟았다. 은행이 문을 닫았다.

코스피 지수가 300대까지 추락했다. 불과 1년 전 1,000이었던 지수가 3분의 1 토막이 난 것이다. 대한항공의 시가총액이 약 2,000억 원까지 떨어졌다. 비행기 한 대 가격 수준이었다.

박현주는 창업한 지 6개월 만에 이 재앙을 맞았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창업을 후회했을 것이다. 6개월만 일찍 창업했어도, 6개월만 늦게 창업했어도. 타이밍이 최악이었다.

그러나 박현주는 다르게 봤다.

"왜 이 나라가 이렇게 무너졌지?"

그가 내린 진단: 한국 금융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 은행은 부동산 담보 대출만 했다. 기업은 은행 대출에만 의존했다. 개인은 예금에만 돈을 넣었다. 자본시장을 통한 직접 투자가 거의 없었다. 돈이 생산적인 곳으로 흐르지 않고, 부동산과 은행 예금에 갇혀 있었다.

이 진단에서 한 문장이 나왔다. 이후 미래에셋의 슬로건이 되는 문장.

"저축에서 투자로."

6. 위기는 기회다

IMF 위기의 한가운데서 박현주는 행동에 나섰다. 그의 전략은 세 단계였다.

1단계: 채권 투자. 위기 직후 한국의 금리가 30%까지 치솟았다. 정부가 외화를 끌어모으기 위해 금리를 극단적으로 올린 것이다. 금리가 30%라는 것은 채권 가격이 바닥이라는 뜻이었다. 금리가 내려가면 채권 가격은 올라간다.

박현주는 운용 자금의 95%를 채권에 투입했다. 나머지 5%를 선물에. 그의 판단: 한국 경제가 완전히 붕괴하지 않는 한, 금리는 결국 내려갈 수밖에 없다. 한국에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같은 경쟁력 있는 제조업체가 있었다. 경제의 기반이 건재했다. 환율과 금리의 오버슈팅은 일시적이었다.

맞았다. 1998년 하반기부터 금리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채권 가격이 올랐다. 박현주의 채권 투자가 대규모 수익을 냈다.

2단계: 주식 투자. 채권에서 수익을 낸 뒤, 박현주는 주식으로 눈을 돌렸다. 코스피 300대. 우량주가 헐값에 거래되고 있었다.

"대한항공 시가총액이 비행기 한 대 값입니다. 이건 미친 겁니다. 이 회사가 영원히 비행기를 안 띄울 건 아니잖아요."

그는 폭락한 우량주를 대거 매입했다. 소수의 시각. "다수가 가는 길을 따라가서는 큰 돈을 벌 수 없다." 소로스가 영란은행의 반대편에 섰듯, 버리가 서브프라임의 반대편에 섰듯, 박현주는 한국 비관론의 반대편에 섰다. 그리고 맞았다.

3단계: 뮤추얼 펀드 출시. 1998년 12월. 박현주는 한국 최초의 뮤추얼 펀드를 출시했다. "박현주 1호." 이름부터 파격이었다. 한국에서 금융 상품에 개인 이름을 붙이는 것은 전례가 없었다.

"제 이름을 걸었습니다. 이 펀드가 실패하면 제 이름이 망하는 겁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습니다."

— 당신이라면? —

1997년 12월. 당신이 박현주다. 39세. 회사를 만든 지 6개월.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코스피가 300대로 추락했다. 금리 30%. 대기업이 부도. 주변의 모든 사람이 "주식은 끝났다"고 말한다. 당신의 자본금 100억 원이 위험에 처해 있다.

  • A. 사업을 접는다. 타이밍이 최악이었다. 살아남는 게 먼저.
  • B. 현금을 지키며 위기가 지나가길 기다린다.
  • C. 오히려 채권과 주식을 산다. 이 위기는 기회다.

박현주는 C를 택했다. 운용 자금의 95%를 채권에 넣고, 이후 폭락한 우량주를 매수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뮤추얼 펀드를 출시했다. 그가 한 말. "코스피가 300이면 더 떨어질 수 있지만, 한국 경제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삼성전자가 문 닫지 않습니다. 현대차가 자동차를 안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답은 하나입니다. 사는 겁니다."

7. 박현주 1호의 기적

1998년 12월 출시된 "박현주 1호" 펀드. 이 펀드가 한국 금융 역사를 바꿨다.

당시 한국인의 돈은 거의 전부 은행 예금에 있었다. 주식에 직접 투자하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펀드를 통한 간접 투자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다. "남에게 돈을 맡겨서 주식을 사게 한다"는 것이 한국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박현주 1호가 이 인식을 바꿨다. 펀드의 성과가 뒷받침됐다. 1999년, 코스피가 300대에서 1,000까지 반등하는 동안 박현주 1호는 100% 이상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은행 예금 금리가 한 자릿수로 떨어지는 와중에, 펀드가 원금의 2배를 돌려준 것이다.

입소문이 퍼졌다. "박현주 펀드에 넣으면 돈이 된다." 은행 예금에만 돈을 넣던 한국인들이 처음으로 펀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수탁고가 급격히 늘었다. 1998년 수백억 원에서 2000년대 초반 수조 원으로. 한국 자산운용 산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버핏이 1956년 오마하에서 10만 5,000달러로 어소시에이츠를 시작한 것처럼, 박현주는 1998년 서울에서 100억 원으로 한국 자산운용 산업을 시작한 것이다. 규모는 달랐지만 의미는 같았다. 한 사람이 한 나라의 투자 문화를 바꾼 것.

8. 버핏과의 차이, 버핏과의 공통점

박현주를 버핏과 비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둘 다 자산운용으로 시작했고, 둘 다 자기 이름을 건 펀드를 만들었고, 둘 다 한 나라의 투자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차이점. 버핏은 주식만 했다. 좋은 회사를 사서 영원히 보유하는 것. 사업 영역을 바꾸지 않았다. 투자에만 집중했다. 박현주는 자산운용에서 시작해서 증권, 보험, 부동산, 벤처캐피탈, 글로벌 ETF로 사업을 확장했다. 투자자이면서 동시에 금융 기업가였다. 버핏이 투자의 거장이라면, 박현주는 금융 산업의 건설자였다.

공통점. 둘 다 위기에서 기회를 봤다. 버핏이 2008년 금융위기에서 골드만삭스를 산 것처럼, 박현주는 1997년 IMF 위기에서 한국 우량주를 샀다. 둘 다 "다수가 공포에 빠질 때 탐욕을 부리는" 사람이었다. 둘 다 자기 이름을 걸었다. 버핏 어소시에이츠, 박현주 1호. 자기 이름이 곧 신뢰였다. 이름이 곧 브랜드였다. 둘 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버핏의 어머니 레일라, 박현주의 어머니. 두 사람 모두 어머니에게서 가치관의 기반을 받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공통점. 둘 다 "아직 현역"이다. 버핏은 94세, 박현주는 67세. 둘 다 아직 싸우고 있다.

9. 이 일화가 우리에게 남긴 세 가지 교훈

첫째, 위기는 구조를 보는 사람에게 기회가 된다. 1997년 IMF 위기 때 대부분의 사람은 "한국이 끝났다"고 봤다. 박현주는 "한국의 금융 구조가 잘못된 것이지 한국 경제가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봤다. 현상(주가 폭락)이 아니라 구조(부동산·대출 의존 금융 시스템)를 봤기 때문에 위기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소로스가 영국 환율 메커니즘의 구조적 결함을 봤듯이, 버리가 서브프라임 대출의 구조적 부실을 봤듯이. 위기에서 돈을 버는 사람은 현상이 아니라 구조를 읽는 사람이다.

둘째, 자기 이름을 거는 것이 가장 강한 신뢰다. 박현주는 한국 최초의 뮤추얼 펀드에 자기 이름을 붙였다. 이것이 투자자의 신뢰를 만들었다. "이 사람이 자기 이름을 걸었으니 대충 하지 않겠지." 투자에서 신뢰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멍거가 "당신이 존경하지 않는 사람과 일하지 마라"고 한 것의 반대편. "당신이 자기 이름을 걸 수 있는 일을 하라." 한국 개인투자자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투자에 자기 이름을 걸 수 있는가. 가족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그 투자를 다시 생각하라.

셋째,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 바람개비를 돌리는 유일한 방법이다. 박현주의 지점 훈.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시장이 좋을 때는 누구나 돈을 번다. 바람이 불 때는 바람개비가 저절로 돈다. 차이가 나는 것은 시장이 나쁠 때다. 바람이 멈출 때. IMF 위기, 코로나 폭락, 금리 인상기. 이때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과 멈추는 사람의 차이가 10년 뒤의 결과를 결정한다.

10. 1998년의 끝에서

1998년 12월. 40세의 박현주. 창업 1년 반. IMF 위기를 정면으로 뚫고 지나왔다. 박현주 1호 펀드가 출시됐다. 채권과 주식에서 수익을 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이었다. 그의 앞에는 한국 금융 산업을 바꾸는 20년이 남아 있었다. 저축에서 투자로. 예금에서 펀드로. 한국에서 세계로. 미래에셋이라는 이름이 한국 금융의 대명사가 되기까지, 그리고 서울의 작은 자산운용사가 글로벌 ETF 플레이어가 되기까지.


1990년, 한신증권의 한 지점. 32세의 지점장이 벽에 한 줄을 걸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는 그 뒤 35년 동안 달려갔다.

연봉 10억을 거절하고, 월급 12만 원의 경험을 선택했다. 외국계의 안정을 거절하고, 100억 원의 창업을 선택했다. IMF의 공포를 거절하고, 채권과 주식을 선택했다. 예금의 안전을 거절하고, 투자의 가능성을 선택했다. 매번 다수의 반대편에 섰다. 매번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바람개비는 돌아갔다.

▶ 한국 투자 거장의 철학을 더 알고 싶다면 — Inteliview 〈여의도 스토리〉

다음 화 예고

〈저축에서 투자로 — 한국인의 돈을 옮긴 남자〉 2000년대, 박현주는 한국인의 돈을 은행 예금에서 펀드로 옮겼다. "국민주"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40대에 UC 버클리 영어 입문 과정에 등록했다. 10대들 사이에서 가장 나이 많은 학생. 하버드가 그의 이야기를 MBA 교재로 채택했다.

자료 출처

  • 박현주,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 (김영사)
  • 홍찬선 외, 『박현주 미래를 창조하다』 (올림)
  • 미래에셋증권, Founder & GSO 페이지 (securities.miraeasset.com)
  • 신동아,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의 증권인생 24년"
  • 아시아투데이, "증권사 샐러리맨에서 투자금융 거물로…박현주는 누구인가"
  • 비즈니스포스트, "[Who Is ?]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 하버드비즈니스스쿨, 미래에셋 MBA 사례 교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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