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켄밀러, 소로스에게 전화를 걸다
1992년 8월의 어느 날, 39세의 한 분석가가 62세의 상사에게 15억 달러짜리 공매도 포지션을 보고했다. 상사는 보고서를 끝까지 듣더니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왜 15억 달러만 걸었지?" 이것은 스탠리 드러켄밀러가 인생에서 가장 큰 베팅을 결정하기 직전의 72시간에 관한 기록이다.

1. 피츠버그에서 뉴욕까지
1953년, 스탠리 드러켄밀러는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화학 엔지니어였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었다.
그는 보든 칼리지에서 영문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미시간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그런데 학업을 중도에 그만뒀다. 이유는 단순했다. 교수들이 가르치는 경제학이 현실의 경제와 너무 달랐던 것이다. "모델은 아름다웠지만 시장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1977년, 그는 피츠버그 내셔널 뱅크(Pittsburgh National Bank)의 리서치 부서에 입사했다. 24세. 월급은 낮았고, 일은 단순했다. 은행이 관심 있는 주식의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
그런데 입사 1년 만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부서장이 그만뒀다. 그리고 은행은 24세의 드러켄밀러를 리서치 부서장으로 승진시켰다. 부서원들은 대부분 40대, 50대였다. 그들에게 25세의 상사가 생긴 것이다.
드러켄밀러는 이 승진의 이유를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제 상사였던 스피로스 드레리오티스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아무것도 몰라. 그래서 자네를 승진시키는 거야. 아는 것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 지식에 갇히거든.'"
이 말이 그의 투자 철학의 시작점이 됐다. 지식보다 유연함이 중요하다.
2. 스물여덟 살의 독립
1981년, 28세의 드러켄밀러는 자기 회사를 차렸다. 두케인 캐피털 매니지먼트(Duquesne Capital Management). 처음 모은 자금은 불과 100만 달러.
초기 몇 년은 힘들었다. 그는 리서치는 뛰어났지만 영업 경험은 없었다. 고객을 모으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러나 성과가 그를 대변했다. 두케인은 첫 10년 동안 연평균 30% 이상의 수익률을 냈다. 한 번도 손실 연도가 없었다. 1986년에는 드레이퍼스 펀드(Dreyfus Fund)가 그를 스카우트했다. 그는 두케인을 유지하면서 드레이퍼스의 여러 펀드도 운용했다.
1988년 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뉴욕에서였다.
"조지 소로스입니다.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3. 소로스의 제안
드러켄밀러는 소로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1987년 블랙먼데이 직후 소로스가 큰 손실을 입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러나 소로스가 자기에게 직접 전화를 걸 줄은 몰랐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뉴욕의 한 레스토랑이었다. 소로스는 58세, 드러켄밀러는 35세. 점심을 먹으며 소로스가 제안을 했다.
"내 펀드를 맡아주세요. 저는 이제 철학과 자선 활동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드러켄밀러는 망설였다. 자기 회사 두케인을 운영하면서 소로스의 퀀텀 펀드(Quantum Fund)까지 맡는 것은 부담이었다. 더 큰 문제는 소로스의 스타일이었다. 소로스는 통제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자기가 물러나겠다고 해놓고 결국 간섭할 거라는 우려가 있었다.
드러켄밀러가 물었다.
"당신이 정말 물러날 수 있나요?"
소로스가 답했다.
"처음 몇 달은 내가 개입할 겁니다. 그 후에는 당신이 결정하세요. 내가 동의하지 않아도 당신이 확신한다면, 내 의견을 무시하세요."
드러켄밀러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1988년 9월, 그는 퀀텀 펀드의 수석 운용역이 됐다.
4. 독일 통일과 파운드의 모순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90년 10월, 동독과 서독이 공식 통일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통일의 정치적 의미에 주목할 때, 드러켄밀러는 다른 것을 봤다. 통일의 경제적 비용이었다.
서독은 동독을 흡수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야 했다. 동독 마르크화를 서독 마르크화로 1:1 교환해줬고, 동독 지역의 인프라 재건에 수천억 마르크를 쏟아부었다. 이 자금 유입이 독일 경제에 강한 인플레이션 압력을 만들었다.
독일 중앙은행 분데스방크(Bundesbank)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렸다. 1991년부터 1992년 중반까지 분데스방크는 기준금리를 꾸준히 인상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됐다.
1979년 출범한 유럽환율메커니즘(ERM, European Exchange Rate Mechanism). 이 협약에 참여한 유럽 국가들은 자국 통화를 독일 마르크화에 연동시켜야 했다. 환율 변동폭을 일정 범위 이내로 유지해야 했다. 목표는 유럽 전체의 환율 안정이었다.
영국은 1990년 10월 ERM에 가입했다. 그런데 1992년 상황이 영국에 최악이었다.
독일은 금리를 올리고 있었다. 영국은 통일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독일에 맞춰 자국 금리도 높게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영국은 경기 침체였다. 실업률이 10%를 넘었다. 주택 시장도 무너지고 있었다. 영국 경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금리를 내려야 했다. 그런데 ERM 때문에 내릴 수 없었다.
드러켄밀러는 이 모순을 봤다. 그가 1992년 여름 자기 팀에게 한 말.
"영국은 두 가지 선택 중 하나를 해야 합니다. 자국 경기를 희생하며 ERM을 지키거나, ERM을 포기하거나. 지금 영국 정치 상황에서 경기를 계속 희생할 수 있을까요?"
답은 분명해 보였다. 영국은 무너진다. 문제는 언제였다.
5. 15억 달러의 첫 포지션
1992년 여름, 드러켄밀러는 파운드 공매도 포지션을 쌓기 시작했다. 규모는 약 15억 달러.
퀀텀 펀드 기준으로도 큰 포지션이었다. 당시 펀드 전체 자산이 약 70억 달러였다. 그 20% 이상이 한 거래에 들어간 것이다.
드러켄밀러의 논리는 정교했다. 그는 네 가지 시나리오를 계산했다.
시나리오 1: 영국이 ERM을 지킨다. 파운드는 현 수준 유지. 포지션 손실은 제한적(금리 차이에서 오는 보유 비용 수준).
시나리오 2: 영국이 ERM에서 자발적 재조정을 한다. 파운드가 5~10% 평가절하. 포지션 수익 약 1~2억 달러.
시나리오 3: 영국이 방어하려 시도하다 실패한다. 파운드 10~20% 폭락. 포지션 수익 3~5억 달러.
시나리오 4: 시장 패닉. 파운드가 자유 하락. 포지션 수익 5~10억 달러.
가장 큰 손실 시나리오(1번)에서도 포지션이 약 3% 손실 수준이었다. 가장 큰 수익 시나리오에서는 300% 이상 수익이 가능했다.
리스크 대비 수익 비율이 극단적으로 좋은 거래였다. 이것이 드러켄밀러 스타일의 핵심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설명했다.
"제가 매번 맞힐 필요는 없습니다. 틀렸을 때 적게 잃고 맞았을 때 크게 버는 구조를 만들면 됩니다. 그게 비대칭 베팅입니다."
그는 이 포지션을 소로스에게 보고했다. 15억 달러, 파운드 공매도, 예상 시나리오, 리스크 계산. 모든 것을 보고서로 정리했다.
6. 그 한마디
1992년 8월 어느 날, 소로스의 뉴욕 사무실.
드러켄밀러가 보고를 끝냈다. 소로스는 책상 뒤에서 한참 침묵했다. 그는 파이프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봤다.
드러켄밀러는 긴장했다. 15억 달러는 소로스 기준에서도 큰 포지션이었다. 혹시 소로스가 "너무 크다"고 반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로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왜 15억 달러만 걸었지?"
드러켄밀러가 멈췄다.
소로스가 계속 말했다.
"자네 분석을 듣고 있는데, 이건 한 세대에 한 번 오는 거래야.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순간이 인생에 몇 번이나 올 것 같나? 그런데 자네는 펀드 자산의 20%만 걸었어. 이건 비겁한 겁니까? 아니면 자네 분석에 대한 자신이 부족한 겁니까?"
드러켄밀러는 즉각 반박하려다 멈췄다.
소로스의 말이 맞았다. 그는 자기 분석에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포지션을 15억 달러로 제한했다. 그 이유는 분석에 대한 자신감 부족이 아니었다. 실패했을 때의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소로스는 그 두려움을 보고 있었다.
"자네가 옳다면, 있는 대로 다 걸어. 펀드 전체를 걸어도 돼. 자네가 틀리다면, 우리 둘 다 빠져나갈 방법을 찾으면 돼. 중간은 없어."
드러켄밀러는 그 방을 나왔다. 다음 몇 주 동안 그는 포지션을 꾸준히 늘렸다. 15억에서 30억, 50억, 80억. 9월 초가 되자 포지션은 약 100억 달러 규모에 도달했다. 펀드 전체 자본을 레버리지까지 사용해 걸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검은 수요일 직전의 퀀텀 펀드 상태였다.
7. 그날의 드러켄밀러
1992년 9월 16일 수요일, 뉴욕 시간 오전 5시.
드러켄밀러는 집에서 일어나자마자 TV를 켰다. CNN이 영국발 속보를 전하고 있었다. 파운드가 ERM 하한선을 뚫었다는 뉴스.
그는 아내에게 한 마디만 했다.
"오늘 끝난다."
그리고 사무실로 출근했다.
오전 8시 30분, 영란은행이 첫 금리 인상을 발표했다. 10%에서 12%로. 드러켄밀러는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파운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후 2시 15분, 두 번째 금리 인상. 12%에서 15%로. 파운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시장은 이미 영란은행의 방어를 무시하고 있었다.
드러켄밀러는 그 순간 결심했다. 포지션을 추가로 늘리기로.
그는 소로스의 사무실로 갔다. "지금 추가 매도합시다." 소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그 오후에 추가로 수십억 달러의 포지션을 쌓았다.
오후 7시, 노먼 라몬트 영국 재무장관이 ERM 탈퇴를 발표했다. 비 내리는 런던의 영란은행 앞 계단. 드러켄밀러는 뉴욕의 사무실에서 그 기자회견을 실시간으로 봤다.
그는 훗날 이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기자회견을 보는데 이상하게 감정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겼다는 기쁨도, 한 국가의 정책이 무너진 것에 대한 죄책감도. 그저 '이게 우리가 예측한 결과구나'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퀀텀 펀드는 그 주에 약 20억 달러를 벌었다. 드러켄밀러가 소로스 밑에서 일한 4년 동안 가장 큰 단일 수익이었다.
1992년 8월. 당신이 39세의 드러켄밀러다. 당신은 자기 분석에 확신이 있다. 영국 ERM 구조는 지속 불가능하다. 당신은 펀드 자산의 20%인 15억 달러를 걸었다. 그런데 상사가 "왜 이만큼만 걸었지?"라고 묻는다. 그는 당신에게 펀드 전체를 걸으라고 한다.
8. 이 일화가 우리에게 남긴 세 가지 교훈
첫째, 분석과 실행은 다른 능력이다.
드러켄밀러는 1992년 여름에 영국의 모순을 정확히 분석했다. 그의 분석은 완벽했다. 그러나 그는 그 분석에 맞는 규모로 행동하지 못했다. 분석 능력은 10점 만점에 10점이었지만, 실행 능력은 10점 만점에 5점이었다. 대부분의 개인투자자도 마찬가지다. 어떤 종목이 오를지 맞히는 것과, 그 확신에 맞는 규모로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답을 알고도 중간 규모로만 걸면, 그 답은 당신의 인생을 바꾸지 못한다. 분석한 뒤에 던져야 할 질문은 "얼마나 걸 것인가"다.
둘째, 리스크 대비 수익이 비대칭이면 크게 걸어라.
드러켄밀러가 1992년에 배운 원칙의 본질은 "모든 거래에 크게 걸어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비대칭이 극단적일 때만 크게 걸어라." 최악의 시나리오에서 3% 잃고 최선의 시나리오에서 300% 버는 거래. 이런 기회는 10년에 한두 번 온다. 그때를 위해 평소에는 현금과 여유를 유지해야 한다. 한국 개인투자자의 반대다. 많은 사람이 평소에 풀매수 상태로 있다가 진짜 기회가 왔을 때 걸 돈이 없다.
셋째, 상사가 더 과감하라고 말하는 순간을 놓치지 마라.
직장에서도 투자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신보다 더 많이 본 사람이 "더 과감하게 하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당신의 경계를 넓히는 기회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경계 안에서 움직인다. 안전하게. 그런데 그 안전이 때로는 자기 잠재력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 드러켄밀러가 소로스의 한 마디로 경계를 깬 순간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성장의 순간이었다. 당신에게 그런 멘토가 있는가? 있다면, 그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따르라. 없다면,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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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 후의 드러켄밀러
2000년 봄, 드러켄밀러는 퀀텀 펀드를 떠났다. 닷컴 버블 붕괴 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은 직후였다. 그는 소로스에게 편지를 썼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화에서 다루기로 한다.
퀀텀을 떠난 뒤에도 그는 자기 회사 두케인을 계속 운영했다. 2010년까지. 그리고 2010년 8월, 그는 외부 자금 운용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두케인은 패밀리 오피스로 전환됐다.
그가 은퇴 발표 당시 공개한 성적표는 놀라웠다.
30년간 연평균 수익률 약 30%.
단 한 해도 손실 연도 없음.
월스트리트 역사상 이 기록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다. 버핏도, 소로스도 이 기록은 갖고 있지 않다. 버핏은 몇 번의 손실 연도가 있었고, 소로스는 1987년과 1994년에 큰 손실을 냈다.
드러켄밀러만이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10. 왜 그는 한 번도 지지 않았는가
많은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30년을 연속으로 이겼는가.
그의 답은 매번 비슷했다.
"저는 매일 포지션을 진지하게 봅니다. 조금이라도 제 분석이 틀렸을 가능성이 보이면, 망설이지 않고 포지션을 줄입니다. 대부분의 매니저는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저는 옳은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돈을 잃지 않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원칙.
"큰 손실이 시작될 때, 왜 손실이 나는지 이유를 찾으려 하지 마세요. 먼저 빠져나오세요. 이유는 나중에 분석해도 됩니다."
2024년 말 기준, 그의 개인 순자산은 약 100억 달러. 그는 그중 대부분을 자선 재단에 기부했거나 기부할 계획이다. 특히 아동 교육과 의학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95세의 소로스가 아직도 살아 있다. 72세의 드러켄밀러도 여전히 시장을 본다. 2023년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AI 관련 주식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밝혔다. 동시에 미국 국채 장기물에 대한 우려도 표명했다. 그의 시장 분석은 70세가 넘어서도 예리하다.
1992년 9월 16일, 그 수요일에 그는 39세였다.
그리고 그 오후, 그가 소로스의 방에서 들은 한 마디가 있었다.
"왜 이만큼만 걸었지?"
그 한 마디가 평범한 애널리스트를 전설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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